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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 궁전에서 누리는 한잔’... 항공사, 눈물 겨운 일등석 와인 공중戰

서비스매너연구소22.10.31

아무리 일등석 일지라도 기내식은 대형 센터에서 반쯤 조리한 음식을 기내에서 살짝 손질해 내놓기 때문에 레스토랑에서 바로 먹는 것만큼 완벽한 품질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와인은 다르다. 일정한 서비스가 가능한 공산품이라 적절한 서비스만 더해지면 똑같은 상태로 맛 볼 수 있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와인 평론가 잰시스 로빈슨. 파이낸셜타임즈, 2021

영화를 보다 보면 항공기 일등석이나 대부호가 소유한 전용기에서는 탑승객이 기내에 오르자마자 웰컴 드링크(welcome drink)로 샴페인 한 잔을 권한다. 각 항공사들은 노래방 선곡집처럼 두꺼운 탑승객 응대 매뉴얼을 반드시 기내에 갖춰야 한다.


아메리칸에어라인 매뉴얼을 보면 ‘일등석 탑승객이 자리에 앉으면 승무원은 이륙하기 전에 오렌지 주스와 물, 스파클링 와인을 함께 올린 쟁반을 보여주며 무엇을 드실지 물어야 한다. 스파클링 와인을 골랐을 경우, 테이블에 면포를 깔고 견과류와 함께 치즈를 접시에 올려 같이 내줘야 한다”고 세심하게 적혀 있다.


일반인 가운데 대부분은 살면서 일등석에 앉아 볼 기회가 많지 않다. 그러나 항공사에 일등석은 기내 서비스의 핵심이다. 어떤 음식을 올렸는지, 함께 나간 와인은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항공사들은 저마다 자존심 경쟁을 한다.


영국 여행 전문 매체 ‘비즈니스 트래블러’에 따르면 일등석 탑승객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5%가 ‘어떤 와인이나 음식이 나오는지 여부가 항공사 선택에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최근 굵직한 글로벌 대형 항공사들이 ‘기내 서비스의 꽃’이라 불리는 일등석 와인 리스트를 일제히 강화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 이어 우리나라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권 주요 국가들이 엔데믹 시대에 맞춰 여행 장벽을 허물기 시작하자, 다시 치솟기 시작한 일등석 승객들을 붙잡으려는 전략이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통계를 보면 비즈니스석과 일등석은 좌석 수로는 항공사 전체 좌석 가운데 3분의 1 정도에 그치지만, 이 자리에서 나오는 수익은 전체 수익의 최대 70%를 차지한다.




전 세계 항공사 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으로 몸집을 불리기로 유명한 에미레이트항공은 지난달 말 유명 프랑스 샴페인 하우스 돔 페리뇽과 독점 공급 계약을 맺었다. 돔 페리뇽은 LVMH그룹이 소유한 프랑스 고급 샴페인으로 보통 20년은 지나야 마시기 좋은 시기가 찾아온다.


에미레이트항공은 이 시기에 맞춰 10월 한달 동안 돔 페리뇽에서 내놓는 가장 비싼 샴페인 ‘플레니튜드(Plénitude) 2′ 2003년산을 일등석에서 서비스한다고 발표했다.


이 샴페인은 해외에서 실구매가 기준으로 750밀리리터(ml) 한병 당 500달러(약 72만원)를 넘나든다. 평소 다른 항공사들은 일등석에서도 보통 150~200달러(약 21만~28만원) 수준 샴페인을 제공한다.


에미레이트항공은 일등석과 비즈니스석에 제공할 좋은 와인을 사기 위해 지난 2006년 이후 16년 동안 10억달러(약 1조 4300억원)를 쏟아 부었다.


이렇게 사들인 와인 650만병을 보관하기 위해 프랑스에 별도로 대형 저장고까지 지었다. 이 와인들 가운데 일부는 저장고에 가만히 보관했다가 2035년이 되서야 아랍에미리트로 옮겨질 예정이다. 13년 넘게 직접 와인을 잘 익힌 후 가장 맛있을 만한 시기에 일등석 탑승객에게 제공하기 위해서다.


2000년대만 하더라도 ‘비행기의 고향’ 미국이나, ‘와인의 본고장’ 유럽에서는 정작 본국 항공사 일등석에서 얼마나 비싼 와인을 내놓는지 여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와인을 그저 기내식에 맞춰 나오는 음료로 여겼기 때문이다.


영국항공(British Airways)은 한때 일등석에서도 5파운드(약 8000원)면 일반 마트에서 살 수 있는 뉴질랜드 와인 ‘빌라 마리아 소비뇽 블랑’을 제공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이후 중동과 중국 등 아시아권 국가에서 일등석과 비즈니스석 등 프리미엄 좌석을 이용하는 탑승객들이 급증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막 ‘와인의 맛’에 눈을 뜬 아시아 큰 손들이 본인들도 알만한 유명 와인을 요구하는 경우가 잦아졌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항공사들은 자존심을 걸고 일등석 와인 쟁탈전에 나섰다.


와인 전문가들은 매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항공사 와인 경연대회 ‘하늘의 와인 저장고(Cellars in the Sky)’에 참석해 어떤 항공사가 가장 좋은 와인을 서빙하는지 평가한다.


이 시상식은 1985년 처음 시작해 올해 2월 36회를 맞은 유서 깊은 대회다. 평가는 온전히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와인 겉면을 가린 채 하는 시음회)으로 이뤄져 선입견이 끼어들 가능성을 배제했다.


올해 수상작을 보면 주요 부문에서 유럽이나 북미권 항공사 이름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대신 싱가포르항공, 카타르항공 같은 아시아권 항공사가 전 부문에 걸쳐 수위권을 싹쓸이했다.


물론 이 대회가 전 세계 모든 항공사 일등석 와인을 대변하진 않는다. 가령 중동 계열 항공사 가운데 에미레이트항공이나 에티하드항공 같은 굵직한 항공사들은 이번 경연에 참가하지 않았다.


올해는 지난해 기준 일등석을 운용하는 세계 주요 75개 항공사 가운데 35곳만 참가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을 이유로 이전까지 일등석을 운영하던 항공사 가운데 상당수가 일등석 서비스를 중지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적 항공사 대한항공은 다른 아시아권 항공사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이전부터 좋은 성과를 거뒀다. 대한항공(21,400원 ▼ 1,050 -4.68%)은 올해 대회에서도 스파클링 와인과 디저트 와인 부문에서 다른 유수의 항공사를 제치고 2관왕을 차지했다. 종합 부문에서도 싱가포르항공과 카타르항공에 이어 3위에 올랐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가장 좋은 와인 물량을 미리 선점하는 사전 구매 방식으로 서비스 품질을 높였다”며 “기내에서 제공하는 와인 원산지와 품종을 최대한 늘려서 탑승객 만족도를 높이려 한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애초에 기내가 좋은 와인을 즐기기 적절한 장소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일등석을 갖춘 대형 여객기는 보통 3만피트(약 9100미터)가 넘는 고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 정도 높이로 비행을 하다 보면 지상보다 기압이 낮아지고 습도가 떨어진다. 코 속과 혀의 기능이 떨어져 상대적으로 후각과 미각이 둔해진다.


전 세계 약 300명 뿐인 ‘와인 박사(Master of Wine)’ 타이틀을 아시아인 가운데 최초로 따낸 지니 조 리(이지연)는 “비행 중 몸 상태가 달라지면서 적포도주는 평소보다 더 떫게 느껴지고, 백포도주는 지상보다 신 맛이 강하게 돈다”고 말했다.


항공사들은 이런 변수를 줄이기 위해 눈물 겨울 정도로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에미레이트항공처럼 유명한 와이너리, 샴페인 하우스와 독점 계약을 맺기 위한 물밑 경쟁은 기본이다.


싱가포르항공은 영국의 세계적 주류 교육기관 WSET에서 와인 자격 인증을 받은 승무원만 일등석 탑승객에게 와인을 따를 수 있다. 호주 콴타스항공은 조리 센터에 지금 만드는 기내식을 어떤 와인과 함께 제공하는지 크게 게시한다.


카타르항공은 와인 총괄 책임자를 아프리카 최고봉(奉) 킬리만자로 산에 올려 보내 와인 맛을 시험한다. 기내 고도와 비슷한 기압에서 와인 맛이 어떻게 변하는지 정확히 잡아내기 위해서다. 핀에어는 녹아내리는 핀란드 빙하를 본 따 와인 향과 맛을 극대화 시키는 전용잔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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