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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수저로 45세 창업, 1000원짜리 팔아 3조 매출… “아직도 고객이 두렵다”

서비스매너연구소23.04.28

 매일 100만명 찾는 가게 다이소

창업주 박정부 회장 단독 인터뷰


1988마흔다섯 살의 박정부는 실직자가 됐다아내와 초등생 두 딸을 둔 가장한양대 산업공학과 졸업 후 최연소 생산 관리자로 16년간 몸바쳐 일했지만말로만 듣던 파업이 그가 관리하던 현장에서도 터졌다노조가 결성되고 투쟁의 소리가 높아지면서 모든 책임의 화살이 그에게로 날아들었다일곱 살에 북한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그가 지녔던 단 하나의 결심이 위태로워졌다. ‘가족보다 먼저 죽지 말자최소한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결혼할 때까진 곁에 있자.’

 

전국 1500여 개 매장에 매일 100만명이 찾아 국민 가게라고 불리는 다이소는 34년 전 박정부(78) 회장의 이런 절박함에서 시작됐다남들이 퇴직을 고민하는 나이새로 시작할 열정이 남아 있을까 자신을 의심했지만, 20대와는 다른 열정이 40대 가장에겐 있었다자식과 가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간절함이었다사무실도 없이혼자 사는 어머니 집에서 밥상을 펴놓고 그는 창업했다.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일본 연수를 기획하는 사업이 첫 시작이었다이를 통해 일본 사회를 알아갔다당시 일본은 경제적으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때그러나 비싼 인건비 때문에 제조 공장이 없어대부분의 생활 소품은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수입하고 있었다가격이 합리적이면서도 질 좋은 국내 상품을 일본에 팔면 어떨까 싶었다. 3단 이민 가방 2개에 작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6시간씩 기차를 타며 일본 열도를 돌아다녔다어느 비 오는 날일본 벽지에 있는 거래처와 미팅이 있었다. 10분 늦었더니 상대는 이미 다른 도매상과 상담 중비 피할 곳이 없어맞은편 처마 밑에 짐 가방을 들고 두 시간을 서 있었다그제야 거래처 사장은 그를 만나줬다집으로 돌아가는 길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 물건은 내가 팔아야겠다.’ 그 결심의 열매가 1997년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 문을 연 다이소 1호점이다그로부터 30년이 채 안 된 지난해다이소는 3조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지난달 16일 출간된 <천원을 경영하라>는 박 회장의 이런 인생 이야기와 경영 비결을 담은 책이다창업 이후 줄곧 시달렸던 질문 일본 기업 아닌가요?”에 대해서도 답한다책은 12월 1주차 예스24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지난 2일 서울 강남 다이소 본사에서 박 회장을 만났다.

 

아성다이소는 한국 기업이다

책이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원래 서점가에선 지금 시즌엔 김난도 교수 책(트렌드 코리아 2023)을 못 이긴다고 하던데감사하다사실 책을 쓴 건 2016년이다서랍 속에 넣고 간직만 하다지난해 11월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주말에 한적한 곳으로 가서 밤을 꼬박 새우며 원고를 다시 읽었다. ‘그때 내가 이렇게 했었지.’ 나 스스로도 가슴 먹먹해지는 대목이 많았다.”

 

일부 임원들은 책 내는 데 반대했다더라.

 

내 노하우가 여기 다 들어 있으니 걱정된 모양이다경영 도서 많이 본다고 경영 달인이 되는 게 아니라고괜찮다고 했다만약 이거 읽고서 우리처럼 할 수 있다면그 사람은 원래 할 수 있었던 사람이다.”

 

올해 초 공동 대표에서 사임했다.

 

회사가 성장하니 내가 실무를 다 챙길 수는 없더라나는 큰 틀에서 회사의 장기적인 전략을 구상하고실무는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도록 대표 이사직을 사임했다창업자는 정년이 없다대표이사에서 물러나도 일이 크게 줄어든 것 같진 않다(웃음).”

 

박 회장은 여전히 매일 오전 5시 반에 일어나 출근한다업무 시간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늦어도 자정이 되기 전엔 잠든다일주일에 3번은 유산소 운동과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한다그의 집무실엔 그 어디에도 잠자는 공간이 없다한 달에 최소 1~2번은 제주에서 강원 고성까지 전국 다이소 매장을 다니며 직원들을 만난다.

 

매장에 자주 가시는 이유가 있나.

 

스트레스가 풀리고 충전이 된다나는 매장 직원들이 참 고맙다전국에 1500여개 다이소 매장이 있는데그 모든 매장에 창업자인 내가 가 있을 순 없다그런데 그 사람들이 주인같이자기 일같이 해주니 너무 고마운 것이다매장을 방문하면 모든 직원의 손을 잡고 감사 인사를 한다물론 격려금도 있다(웃음).”

 

자의 반타의 반으로 사업을 시작하셨더라.

 

내가 관리하는 현장에서 파업이 터지면서일하기가 힘들어졌다한마디로 회장에게 찍힌 거였다졸업 후 첫 직장으로 나름 성과도 많이 냈다고 생각했는데막상 그렇게 되고 나니 참 견디기 어려웠다. 3년을 고통 속에 있다가 회사를 정리했다내 열정이 다 소진된 줄 알았는데절박한 상황에 놓이니 다시 살아나더라.”

 

박 회장은 1988년 일본 100엔숍 등에 저가 생활용품을 수출하는 무역회사 한일맨파워(현 아성HMP)를 설립한다. 2002년 무역의 날에 1억불 수출탑을 수상했고일본에 수출을 가장 많이 할 때(2003)는 그 금액이 2142억원에 달하기도 했다박 회장은 당시 대일 무역역조가 극심했는데이를 개선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바지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했다고 했다. 1992년엔 국내에 균일가숍을 개점하기 위해 아성산업(현 아성다이소)을 설립했다첫 매장을 열기까지는 5년이 더 걸렸다.

 

어머니가 아성'이라 지어주셨다고 하더라.

 

“‘아시아에서 성공하라고 지어주신 이름이다어머님은 정신력이 대단하신 분이었다남편을 잃고 홀로 삯바느질로 4형제 공부를 다 시키셨으니까어머님이 96세에 돌아가셨는데지금도 어려울 때면 어머니 생각을 한다이 상황에 우리 어머니라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하고.”

 

매장 이름은 왜 다이소가 됐나.

 

“97년 처음 1호점을 낼 땐 아스코이븐프라자’ 였다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이름이었지만발음이 어렵고 생뚱맞다는 의견이 많았다. 2001년 내가 물건을 납품하던 일본 회사(대창산업)에서 지분 투자를 받으면서, ‘다이소란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대창산업을 일본어로 하면 다이소산교그들이 일본에서 운영하던 100엔숍 이름이 다이소였다. ‘필요한 것은 다 있소란 우리의 핵심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재밌는 이름이면서도유치원생도 기억할 만큼 쉬워서 우리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 이름이 발목을 잡을 줄 몰랐다아직도 일본 기업 아니냐는 오해를 받는다그러나 아성다이소는 내가 만든 한국 기업이다다이소산교는 우리 경영에 참여한 적도 없고우리가 로열티를 낸 일도 없다여러 번 이름을 바꿀까도 고민했지만, ‘다이소에 익숙한 소비자들이 많아 고민이 크다.”

 

다이소산교는 왜 지분 투자를 했나.

 

하루는 다이소산교 회장이 자신들에게만 독점으로 납품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기회이기도 했지만위험도 컸다그쪽이 거래 관계를 끊으면 끝이니까위기 관리 차원에서 그럼 우리 회사에 투자를 해달라고 했다그때 받은 돈이 4억엔(약 385000만원)이다외국 기업의 주식 투자만으로 그 나라 기업이라고 한다면우리나라에서 외국 기업 아닌 곳이 없을 것이다.”

 

독도사랑 운동본부와 업무협약을 맺고 후원을 지속하고 있다.

 

“2013년쯤 이른바 다케시마 후원기업에 아성다이소가 포함됐다는 루머가 나와 홍역을 치렀다당연히 사실이 아니다이 일이 있고서 독도 후원을 시작했다. 2020년 12월엔 이 노력을 인정받아 독도 사회공헌특별상도 받았다이 사실 때문에 일본에선 역으로 다이소산교가 독도 지원을 한다는 오해를 사 일본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기도 했다. ‘우리 오해는 우리가 풀 테니너희는 너희가 풀라고 했다우리가 정말 일본 기업이라면 이런 일이 가능하겠나.”

 

가격은 싸도싸구려를 팔진 않는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싼 게 비지떡이란 인식이 강하다.

 

어찌 보면 지난 30년은 이런 통념과의 싸움이었다우리는 가격이 싼 상품을 팔지만 싸구려를 팔지는 않는다소비자는 품질이 나쁘면 1000원도 비싸다고 느낀다좋은 상품은 신기하게도 소비자가 먼저 안다그 수만 가지 제품 중에서 판매가 대비 원가가 높고기능도 좋은 상품만 소비자는 쏙쏙 집는다(웃음).”

 

 값이 싸면서도 좋은 품질을 유지하는 것만큼 어려운 과제도 없을 텐데.

 

“‘균일가 사업은 마진을 좇는 순간 망한다값싼 상품을 찾아 이윤을 먼저 추구하기보다싸고 좋은 물건으로 많은 고객이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이를 위해 국가별 특성에 맞는 제품을 발굴하고원료 주산지까지 찾아다녔다동남아부터 유럽남미 등 안 다닌 곳이 없다코로나 전엔 매년 20회 이상 나갔다항공 마일리지만 150만 마일이 넘는다따져보니 지구를 60바퀴 넘게 돌았더라이젠 어떤 물건을 보면 얼마만큼 가격을 낮출 수 있을지가 보인다.”

 

명절 때도 해외 출장을 가셨다더라.

 

명절에 우리는 쉬지만그렇지 않은 나라들이 많다그동안 못 봤던 시장도 보고 공부도 할 수 있다한번은 출장을 갔다가 호텔로 돌아오는데크리스마스캐럴이 들리더라직원에게 이 음악이 왜 나오느냐고 물었더니, ‘오늘이 크리스마스이브입니다’ 하더라직원들에겐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택시 요금이 1000원일 때부터 균일가숍을 시작해아직도 1000원을 고수한다.

 

균일가는 우리의 사명이다인플레이션으로 1000원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해도상품 가격을 올리지 않고그 가치에 맞는 상품을 계속 개발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다다이소가 국내 소비자 물가를 0.1%라도 낮출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마개에서 유해 물질이 나와 논란이 된 아기 욕조 등 다이소가 아플 만한 내용도 책에 썼다.

 

아기 욕조는 국가공인시험기관으로부터 시험인증된 상품임을 확인하고 납품받아 판매했지만협력업체에서 납품 중간 원료 공급 업체를 임의로 변경하면서 생긴 일이었다다이소의 법적 책임은 없다고 해도도의적 책임은 있다고 생각했다이를 고객에게 진솔하게 설명하고앞으로는 사전에 더 철저히 예방관리 하겠다는 약속 차원에서 썼다고객이 찾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매장을 운영하겠나나는 아직도 고객이 두렵다.”

 

경단녀내겐 살림의 귀재로 보였다

2016년엔 경력 단절 여성의 고용을 창출한 기여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직영점 점장 99%, 매장 직원 95%가 여성이다이 가운데 30~50대 경력단절 여성 비율이 93%(2022년 기준)사회에선 이들을 경단녀라고 하지만내 눈엔 그들이 귀중한 육아 경험과 살림 센스가 있는 살림의 귀재들로 보였다생활용품을 잘 알고 아이디어가 많을 뿐 아니라몸에 밴 정리와 관리 습관이 우리 업무와 잘 맞는다매장 곳곳에서 이들의 센스가 발휘되고 있다.”

 

-흔히 한국에서 사업하려면 필수라고 여겨지는 두 가지, ‘골프와 술 접대를 안 한다더라.

 

골프는 친구들 성화에 1년에 4번은 간다실력이 늘 리도 없고스트레스가 풀리지도 않더라그러다 보니 골프 하는 시간이 점점 아깝다또 밥 먹고 술 접대받는 건 고객을 위한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협력업체와의 관계는 어려운 부분을 함께 고민하고 오랫동안 함께 갈 수 있는 협업구도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지밥 먹고 술 마시면서 친분을 쌓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래처에 전액 현금 결제하는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다이소가 취급하는 상품 대부분이 중국산일 것이라 생각하지만실은 국내 협력업체 제품이 전체 매출에 70%를 차지한다거래하는 국내 제조업체만 900개가 넘는다중소 업체와 상생을 모색하는 게 우리의 책임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낮은 구매 단가를 보장받는 대신 100% 현금결제대량주문장기간 거래 등 신용에 기반을 둔 거래를 한다.”

 

살 게 없어도 다이소만 보면 무의식적으로 들어가 매장을 배회하는 다이소 증후군이란 신조어도 생겼더라.

 

서울 강남에 매장을 낼 땐 누가 벤츠 몰고 와서 천원짜리 물건 사겠느냐고 했다그러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부자든 아니든 고객은 1000원의 가치보다 더 큰 만족감을 주는 상품이 있으면 사고 싶어한다다이소는 지갑이 얇아서 가는 곳이 아니다필요한 상품이 있기에 가는 곳이다특히 요즘 젊은 층 사이에서 다이소는 재미와 의미를 공유하는 놀이 공간으로 여겨진다얼마 전 배우 한소희씨가 생일파티 때 착용한 핑크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와 귀걸이가 대표적이다어린이들을 위해 기획한 상품이 젊은 여성들 생일 파티 필수품이 됐다물론 이 제품도 가격은 1000원이다.”

 

다이소에선 매달 600개의 신상품이 나온다한국은 특히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는데어떻게 이를 대비하나.

 

출장을 일주일 가면 5일은 밤낮없이 상담에 매달리고이틀은 시장조사에 나선다값싼 매장부터 최고급 매장까지 다니면서 뭐가 다른지 항상 공부한다그러다 보면 한국도 이런 물품이 필요할 텐데’ 싶은 게 있다원예 용품이 대표적인데, 7년 동안은 소비자들이 움직이지 않더라그런데 코로나를 맞아 식물 기르는 수요가 크게 늘면서반응이 폭발했다부부 동반으로 개인 여행을 가도 나는 관광지 구경 대신 쇼핑을 간다고급 레스토랑 가서 밥 먹을 때도그릇부터 뒤집어 본다어디 제품인지 보려고(웃음).”

 

'가족보다 먼저 죽지말자'

나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한 번도 아버지를 불러본 기억이 없었다친척들 말에 의하면 9·28 서울 수복 때 북한군이 후퇴하며 아버지를 북한으로 끌고 가려고 했단다그런데 아버지가 완강하게 저항하자 회사 뒷문에 세워놓고 총살을 했다는 것이다.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라고 책에 쓰셨더라.

 

아주 어릴 땐 못살진 않았다아버지가 공장을 경영하셨으니까그런데 내가 일곱 살 때 6·25가 발발했다김포 외가로 피란을 갔는데그곳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통보를 받았다집으로 돌아가 보니 폭격으로 공장과 집이 다 폐허가 됐더라어머니가 생활 전선에 뛰어드셨지만끼니조차 챙기기 어려운 때가 많았다둘째 형만 어머니 곁에 남고 큰형과 나는 큰댁으로막냇동생은 외가로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 ‘가족보다 먼저 죽지 말자최소한 아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결혼할 때까진 곁에 있자고 결심했다.”

 

그 약속을 지키셨다.

 

옆에서 지켜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 같다자상하고 친절한 아빠는 못 되었다.”

 

일을 배우던 큰딸이 아빠만큼은 못 하겠다며 경영에서 한발 물러섰다고 하더라.

 

대학 졸업하고 3~4년 일했는데어느 날 난 아빠만큼 못 할 것 같다며 미국에 가겠다고 하더라주저하지 말고빨리 가서 네가 하고 싶은 것 하라고 했다그렇게 얘기하기까지 스스로 얼마나 고민했을지 아니까지금은 미국에서 아이들 키우면서 잘살고 있다우리 손주들이 다 수재급이다하하!”

 

작은딸은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혼도 내고 그러시나.

 

여기(회사)선 안 하고다른 데 가서 한다(웃음). 혼내는 건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결국 스스로 느껴서 해야 한다.”

 

은퇴하고 편하게 지낼 생각은 없으신가.

 

친구들도 이젠 일을 놓고같이 어울리자는 얘기를 많이 한다그러려면 노는 게 즐거워야 하는데나는 주말 이틀을 일하지 않고 보내는 것도 쉽지가 않다일을 해야 엔도르핀이 솟는다.”

 

젊은 시절의 박정부만큼 힘든 청춘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처음 균일가숍 한다고 하니 1000원 팔아서 뭐 남느냐고 하더라그 1000원이 3조가 됐다끈기를 가지고 몰입하면 반드시 남들하고 다른 게 나온다지금 청년들은 과거 우리 때보다 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다더 잘할 수 있다.”

 

'아시아에서 성공하라는 이름을 지어준 어머니가 지금 다이소를 보면 뭐라고 하실까.

 

많이 자랑스러워하시겠지어머니 업고 여행 한 번 못 가 본 건 그래도 후회가 된다.”

 

책의 말미엔 박정부의 인생을 요약하는 한 문장이 적혀 있다. ‘원자(原子)와 같은 작은 성실함이 내 운명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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